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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틈은 왜 점점 더 벌어질까

쿨쿨

by 흙냄새 밟고 오르다 2014. 2. 15.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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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즈네프와 레이건으로 대변되던 냉전의 열기, 그 시대에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분명하게 서로 적이라고 가리키는 대상이 있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로 인해 공산주의는 무너졌고, 세상은 자본주의 만세를 부르며 얼싸안고 춤을 췄다. 앞으로 살기 좋은 세상이 올 거야 그렇게 믿었다.


순진한 믿음으로 버틴 세상, 공산주의라는 적이 사라진 세상에서 빈부격차는 줄어들 줄 알았다. 노동자와 당 간부 간의 빈부격차는 공산국가를 무너뜨리는 촉매 그 이상의 반응물이었다. 그런데 이 틈은 (자본주의만의 세상에서) 금융 위기 등의 어려운 시기를 거치면 거칠수록 좁혀지는 게 아니라 더욱 벌어지고 있다. 문제는 온 세상이 그렇게 변했고, 현재도 진행 중이라는 점이다.


자본주의라는 화폐는 맞서 싸울 맷집을 가진 공산주의라는 계급이 사라지자 새로운 적이 필요했다. 그리고 화폐를 많이 가진 기득권은 그 칼날을 자본주의를 믿는, 아니 자본주의에 의지하는 약자에게로 겨눴다. (그리고 분노했다.)


전략은 성공적이다. 100이었던 덩치는 어느새 훌쩍 10000을 넘어섰다. 다만 약자는 여전히 1 또는 어쩌다 2 를 가지고 있다. 100분의 1로 줄었는데도 가진 자의 단순한 홍보에 현혹되거나 지레 포기한다. 포기하는 변명의 상당수는 (가진 자를 위한) 정부 때문이다. (가진 자는) 전술에서 실패를 해도 기득권의 뒤에 늘 든든한 정부가 있다. 정부는 가진 자의 손실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약자는 호주머니에 숨어있는 비상금을 세금으로 바치며 가진 자의 실패를 늘 메꿔준다. (그리고 분노한다.)


세상은 오웰 조지의 '1984'보다 더 심각한 상처를 드러내고 있다. 암세포를 도려내야 사람은 살 수 있는데 요즘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암세포만이 편하게 숨을 쉬고 있다. 자본주의의 탐욕스런 위협은 마르크스 칼의 '자본론'을 태어나게 했던 시절보다 더 강한 작용으로 오래전부터 힘을 쓰고 있다. 혁명을 잊은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세상의 틈은 예전 혁명을 만든 시대보다 더 깊고 더 넓고 더 어둡다.


공산주의. 사회주의 탄생에 분명한 계기가 있었다. 자본론 이후, 자본주의에 반작용으로 도전하는 새로운 혁명은 (누구도 모르게 시나브로) 준비 중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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