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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 거미

횡설수설 취미/시

by 흙냄새 밟고 오르다 2008. 10. 21.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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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설움과 자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창비 시선 68 김수영 시선집 <사랑의 변주곡> - 창비 - 초판 14쇄 2008년 6월 30일



백석의 시 '修羅'가 절로 생각났다.


수라에선 거미를 지켜보는 화자가 시인이었다. 시인이 어미 거미에게서 애틋한 맘을 부여잡았다면 김수영의 시에서는 그 맘을 느낄 여유조차 없다. 오히려 늙어가는 거미에게서 시인이 겪었던 비명마저 시들었다.


서글픈 고통을 울며불며 이 짧은 시가 내 몸에 토하고 있다. 내 등을 뚫고 까맣게 타버린 흉터는 아물 줄을 모른다.


히로히또의 군홧발, 박정희의 군홧발. 왜 독재가 식민지 시절보다 힘들고 추악할까? 왜 더 슬프고 괴로울까? 아마 그 독재가 휘두르는 총칼도, 그것에 찔리는 피와 비명도, 바로 같은 겨레, 같은 동포이기 때문이리라.


시인을 밟고 있는 군홧발은 박정희의 것이다. 그 폭력은 거미를, 늙어가는 거미마저 죽였다. 죄악이다. 그러나 아직도 그런 죄악을 자랑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는, 전혀 바뀌지 않은 세상으로 남아 있다. 오히려 어리석은 대중은 그 시절마저 추억한다.

시인이 죽지 않았다면, 아마 그는 이런 시마저 각혈하지 못한 채 치매로 세상을 잊어버리지 않을까?


서늘해진 가을, 무심코 거미를 손가락으로 짓누르곤 한다. 거미의 비명은 들리지 않는다. 내가 외면하기 때문이다. 내가 토하는 비명은 누구에게 들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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