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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 修羅

횡설수설 취미/시

by 흙냄새 밟고 오르다 2008. 10. 27.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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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모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어니젠가 새끼거미 쓸겨나간 곳에 큰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적은 새끼거미가 이번엔 큰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아나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라운 종이에 받아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정본 백석 시집> - 문학동네 - 1판 7쇄 2009년 9월 17일



콘크리트, 시멘트, 아파트.

이 시를 읽으면서 비록 조그만 집이라도 마당이 있어서, 그런 곳에서 살고 있어서 기뻤다.


시가 전하는 풍경은 흔하면서도 또 흔하지 않다. 고층 아파트에선 볼 수 없지만 마당이 있는 집이라면, 그 마당에 나무가 있고, 그 나무에 새가 기대는 집이라면, 그런 집에선 흔하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열린 창으로 바람에 날아 왔을까? 아니면 애당초 집터에 터줏대감으로 살았던 먼 조상의 자식일까? 아무튼 방바닥에서 서툴게 헤매는 거미를 볼 때 무심코 꾹 눌러죽이곤 했던 내게 이 시는 미안한 변명을 입안에서 맴돌게 만든다.


모욕과 굴욕이 넘치던 시인 백석이 살던 그 시절보다 더 암울한 요즘, 가끔 내 자그만 방에서 데굴거리는 거미를 사알짝 잡아 햇볕과 바람이 살랑거리는 조금 더 너른 마당으로 놓을 때마다 괜한 미소를 겸연쩍게 짓곤 한다.


억지로 행복을 끄집어내지 않았다. 그냥 작은 거미를 살짝 잡아 마당에 던졌을 뿐이다. 그 마당에서 참새 소리와 함께 라일락 냄이 밀려올 때, 죽은 친구를 떠올릴 때, 내 얼굴에 저절로 그려진 기호는 모두 행복이다.


마당에 상추, 상추쌈에 고추장. 창문을 열자 바람이 밀려온다. 보안등은 꺼져있다. 거미와 마당이 있는 조그만 집에서 열린 창으로 하늘을 봤다. 파랗다. 파란 하늘아래 거미를 놓으면서 미안한 변명도 던졌다. 그 변명을 용서해줄까? 누가 내 변명을 용서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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