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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 - 處容斷章 1-4

횡설수설 취미/시

by 흙냄새 밟고 오르다 2009. 1. 2.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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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있던 자리에

軍艦이 한 척 닻을 내리고 있었다.

여름에 본 물새는

죽어 있었다.

물새는 죽은 다음에도 울고 있었다.

한결 어른이 된 소리로 울고 있었다.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없는 海岸線을

한 사나이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

한쪽 손에 죽은 바다를 들고 있었다.



김춘수 시집 <處容斷章(처용단장)> - 미학사 - 1991년 10월 15일



겨울의 시작은 언제부터일까? 과연 그 출발점을 알 수 있을까? 겨울에 눈이 온다고 하지만 그게 겨울의 전부는 아니다. 눈은 겨울을 대표할 뿐이다. 즉 절정에 있다고 해야 하나. 그 발단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 시를 읽으면서 그 흔한 사실을 의심한다. 아니 의심하도록 만든다. 마치 심리 조작에 걸렸다고 해야 하나?


낯익음을 낯설게 만들어버리는 시의 힘을 느꼈다. 이것은 시의 전반에 걸쳐 짙게 뿌리박혀 있다.


배가 닻을 내리는 것은 당연한데 바다가 있던 자리에 닻을 내린다고 한다. 그것도 군함이란 생소한 시어로 그 낯설음의 정도를 진하게 만든다.


죽은 물새가 한결 어른이 된 소리로 운다. 당혹스럽다. 죽어서도 나이를 먹는 걸까?


바다가 없는 해안선에서 죽은 바다를 들고 오는 사나이. 해안선에 군함은 온전히 서있을까? 과연 그 사나이는 어디서 왔을까? (죽은 바다가 혹시 처용이 왔던 동해일까?)


낯설어 어쩌면 외면하기 쉽다. 하지만 시인이 건넨 첫 의문에 낚여버린 난 그 낯설음을 도무지 외면할 수 없다. 시인의 의도는 모른다. 아니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이 시를 처음 접하고 20년이 흘렀다. 20년 전 그때는 시인의 의도를 교과서를 앞에 놓고 아나운서마냥 외웠다. 그리고 기억했던 적이 있다.


시인보다 나이를 먹었는데도 여전히 낯설음보단 낯익음이 낯설다. 아직 세상에서 풋내기라 한숨을 내뱉으면서도 죽은 바다를 들고 온 사나이가 있던 해안선에 가고 싶다. 그곳에서 세상 살아가는 경험을 조금이라도 묻혔다고 그가 반겨줄 것만 같다.


어제 비가 왔다. 한겨울에 비가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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