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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정 - 호텔 아프리카

횡설수설 취미/만화

by 흙냄새 밟고 오르다 2008. 12. 17.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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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도화지가 있다. 그 도화지를 반으로 접는다. (유타에 있는) 호텔 아프리카, 그리고 뉴욕이 각기 그 반씩 차지하고 있다. 서로 다른 시간대, 다른 공간인데도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비슷한 흔적이 새겨졌다.


그 흔적은 호텔 아프리카에서 살아가는, 살아갔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 삶을, 수십 가지 색깔과 빛깔이 섞인 흔적을 기억하고 전하는 이가 바로 엘비스다. 도화지가 찢어져도 엘비스 때문 그 흔적은 사라지지 않을 거다. 그래서 엘비스를 이 작품의 주인공이라고 말하고 싶다.


뉴욕의 엘비스는 대개 특정 자극에 의해 호텔 아프리카를 추억하고, 그 반향을 다시 뉴욕에서 느끼곤 한다. 그 자극들은 작품 전체 속 하나의 에피소드를 끌어내는 소재면서도 주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상황과 캐릭터이기도 하다.


제목 그대로 배경이 된 호텔 아프리카의 이야기를 과거, 뉴욕을 현실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엘비스는 이미 다 컸으니 옛날이야기 아니냐면 반박할 수 없지만 그것은 작품 전체에 마치 오늘의 모습처럼 뉴욕에 살고 있는 현실과 묘하게 이어져 단순히 과거의 사실로만 가둬두고 싶지 않다.


어쩜 이 만화 속 사건들은 (발표 당시) 대한민국의 현실과 거리감이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요즘) 조금만 속살을 엿보면, 그 거리감이란 말은 생소해졌다.


사건, 즉 에피소드는 결국 사랑 이야기다. 사랑뿐, 사랑밖에 없다. 시대가 다르다고 사랑이 변하지는 않는다. 다만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변할 뿐이다. 그리고 무대는 낯선 유타, 뉴욕일 뿐이다.


이것은 순정만화의 지독하리만큼 어설픈 사대주의에서 근거한 거지만 김혜린의 '불의 검', 김진의 '바람의 나라' 정도를 빼곤 대부분 순정만화 작가 모두가 가진 단점이자 약점이라 굳이 따로 폄하하고 싶진 않다. 나이를 먹어 깨우치면 된다. (그러나 이후 작품을 보지 않아 고쳤는지 모르겠다. 내 또래인데 아직도 코쟁이와 영어로 된 무대를 밝힌다면 작품의 구성과 인물이 아무리 멋져도 결국 3류 순정만화라는 지적을 반박하기 어렵다. 그렇게 퇴보하지 말길 진심으로 바란다.)


뜨겁고 차갑고, 마치 사막의 날씨처럼 무수한 사랑 얘기가 호텔 아프리카에 밀려왔다 밀려간다. 등장횟수나 비중과 상관없이 사랑을 하는 모든 등장인물을 잊을 수가 없다. 잊기 어렵다. 이것이 이 작품이 가진 가장 우월한 매력이다.


호텔 아프리카. 처음 예쁜 그림체에 반하고, 그 등장인물에 녹아든다. 그러나 장점만 있지는 않다. 서툴고 모자란 면 역시 있다. 특히 대사, 가끔 어울리지 않는 대사가 튀어나올 때마다 살짝 당황스럽고, 실망도 한다.


대사, 앞뒤 잘라먹고 (읽는이의 입장에서) 듣기만 하면 멋지다. 하지만 그 대사를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 읽는이 입장에서 공감하기 힘든 것이 많다. 일자무식이 원효대사의 대승기신론을 논하거나, 까막눈 어부가 백석의 시를 논한다고 해야 할까?

물론 타고난 본성이나 자질 때문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그게 변명이라고 외쳐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이 작품의 일부 등장인물은 상식을 넘어섰다. 특히 노아의 경우 가장 공감하기 어렵다.


이래서 만화라는 장르가 흔히 순수문학에 비해 모자란 게 아닌가 오해를 키우지 말자. 조그마한 만화 시장, 특히 순정만화인 경우 잘난 척 하는 등장인물이 많을수록 좋다면서 강요하는 출판사의 입김을 당시 20대 중반의 만화가가 무시할 수도 없었을 테니까. 그렇지만 어쭙잖은 비교로 어설픈 평가를 경고할 만큼 이 작품이 가진 장점은 많다. 최근 박희정이 어떻게 커졌을지 궁금해진다.


사랑 때문에 가슴이 벅찬

그런 사람들만 오는 곳!

흑인이거나 백인이거나

잘 살거나 못 살거나,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그저 따스한 가슴만이 중요한 곳.


호텔 아프리카를 찾아온 사람들을 지워버릴 수 없으니까. 그들의 따스한 눈빛과 목소리를,


☆인상 깊은 구절☆

"착한 사람"
"착한 눈으로 나를 보니까"

노마와 에드의 대사지만 이렇게 사랑한다면? 이렇게 세상을 바라본다면!


☆인상 깊은 장면☆

호텔 아프리카에 두 번 눈이 내렸다. (처음 눈이 내리던 날 엘비스는 아버지를 사막에 내리는 영혼처럼 만난다.) 두 번째 눈이 내리던 날 지요는 사랑을 고백하고 아델라이드는 사랑을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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