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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타 - 천사의 섬

횡설수설 취미/만화

by 흙냄새 밟고 오르다 2014. 4. 2.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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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타의 그림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똥덩어리 같은 대사나 설정도 그렇고, 무엇보다 그림에 정이 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몇 번이나 읽었다. 그때마다 꺼억 트림 한 번 크게 내뱉으면서 만족스런 얼굴을 거울에서 확인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제법 그에 대한 편견이 버티는데도,
괜히 세상을 비판한답시고 무거운 똥덩어리로 끙끙대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신의 입장을 놓치거나 흘리지 않았다. 내가 이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다.


윤규복.


천사의 섬에 덩그러니 살고 있는,


유일한 사람.


왜 그가 이 섬에 있는지 고리타 말곤 모른다. (어쩌면 그도 잊었는지도,)


그리고


줄리엘.


천사.

왜 이 섬에 왔지?

그것도 기상청 직원이,


그리고 천사는 여자다.


무인도에서 혼자만 살고 있던 윤규복이 어떻게든 세상과 소통하려는 부질없는 짓거리를 할 때 파도소리와 함께 초라한 그의 모습이 점점 멀어지는 연출은 그가 처한 상황을 대변한다. 그러나 (여자인 천사가 아닌) 천사인 여자가 바닷가에 쓰러진 것을 발견하자 단지 글자 하나의 효과음, 불끈거리는 윤규복의 감탄사는 그가 아직 살아갈 힘은 있구나 위로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 연출은 고리타 말고 누군가 아주 멀리 떨어진 - 혹은 아주 높디높은 - 곳에서 윤규복과 줄리엘을 보고 있던 것이 아닐까?


줄리엘은 늘 허기진 윤규복이 (사람이라면) 버릴 수 없는 성욕으로 자신을 봤어도 그에게 도움을 준다. 마음을 들었다고. 줄리엘에게 윤규복도 의도하지 않았던, 아니 모르고 있던 마음이 전해진 걸까. 아마 그것은 둘의 인연을 계속하게 만들고, 결국 윤규복이 섬을 나갈 의지를 일으킬 수 있던 것인지도. 그리고 마음을 읽는 능력을 윤규복도 얻으면서 섬에서의 일상은 크게 바뀌게 된다. 혼자였던 무인도지만, 이제 혼자가 아닌 섬이기 때문이다. 천사 줄리엘은 말할 것도 없고, 늙은 거북 투르트와 돌고래 핀이 있다.


투르트.


섬을 벗어난 본 적 없는 - 벗어날 수조차 없던 - 투르트가 브라자를 알고, 단테의 신곡을 언급할 정도면 윤규복 전에 사람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었을까? 혹시 그 때도 천사가?


천사의 섬은 온통 은유와 직유, 상징으로 가득하다. 이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수면욕은 매일 매일 챙기고 있고, 성욕은 어쩔 수 없다. 식욕은? 줄리엘의 도움으로 물고기를 얻었지만 그들의 말을 듣게 된 순간 김춘수의 '꽃'처럼 그것은 그가 되고 도무지 먹을 수 없다. 어찌 보면 서로 말이 통하고 똑같은 감정을 공유하면서 쉽게 서로를 죽일 수 있는 존재는 사람뿐이다.


천사의 섬은 온통 은유와 직유, 상징으로 가득하다. 이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심지어 줄리엘의 방귀마저도.


시간이 갈수록 줄리엘의 천사로서의 능력은 옅어지고 있다. 줄리엘은 제 몸에서 문신처럼 새겨진 피를 보면서 혹시 자신이 사람이 되나 의심한다. 졸기까지 한다. 성욕도 생기겠군. (윤규복 힘내!) 줄리엘은 결국 천사로서의 능력이 사라질 거라는 걸 인정하고 마지막 힘을 짜내 윤규복이 섬을 탈출할 기회를 줬다. 그러나 윤규복은 그토록 바랐던 욕망이자 기회를 과감히 포기한다.


그리고 많은 것이 변했다. 줄리엘은 갑자기 잠을 잔 채 깨어날 줄 모르고, 늙은 거북은 윤규복의 눈앞에서 그 긴 목숨을 놓았다. 그리고 핀과 대화를 할 수 없다. 소통의 가능성은 친구였던 시간의 무게 때문 남아있지만, 섬에서 대화할 수 있는 존재는 더 이상 없다. 줄리엘이 잠에 들었어도 대화가 가능했었는데 왜 갑자기 할 수 없게 되었을까?


섬은 단순히 망망대해에 놓인 섬이 아니다. 세상을 은유한 섬이다. 변기에 똥을 쏟아낸 쾌감보다 더 길게 가져갈 수 있는 희망을 세상 속에서 놓치지 말자.


줄리엘이 오기 전 '나'만 있던 세상에서 살던 윤규복은 더 이상 거북이 등껍질처럼 뎅그러니 남고 싶지 않다.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 투르트와 핀, 호프와 소통했던 대화를 원한다. '나'와 '너'가 있는 세상을 원하고, 결국 윤규복은, 섬을 나갈 결심을 한다. 투르트는 아마 윤규복의 다른 자아일지도 모르겠다. 투르트가 죽은 것은 윤규복이 변했다는 것이고, 등껍질은 마지막 갈등이고, 도끼는 그 갈등을 이겨낸 것이리라.


윤규복은 언제고 섬을 찾아오겠다고 말했다. 그 때 섬은 오랜 시간 절망했던 그것은 아닐 것이다. 바다라는 세상을 견뎌낸 윤규복에게 섬은 지구에서 돌아온 어린왕자가 다시 만난 장미와 같으리라. 그 날 윤규복은 핀과 호프와 대화를 할 수 있을까? 난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


☆인상 깊은 구절☆


"정말인지 사물을 제 용도로 사용할 줄 모르는군요."

힙색은 호신용 돌팔매로, 사진기 렌즈는 돋보기로, 열쇠는 톱으로 변명한 채 사용하는 윤규복에게 줄리엘의 대꾸가 참 재밌다. 동시에 씁쓸하다. 세상엔 그런 사람들 투성이니까. ('그런'이란 말로 애써 거리를 두려는 나 또한 마찬가지다.)


투르트 : 뭐 어차피 동물이 지옥 간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으니 허허……

윤규복 : 천당 간다는 얘기도 없지.
투르트 : 그럼 난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여.

탐욕은 모든 욕망을 아우르는 사람만이 가진 본성이다. 사람은 힘이 세다. 힘인 센 존재의 탐욕은 결국 투르트와 같은 짐승에겐 살아서도 지옥일 뿐이다.


☆인상 깊은 장면☆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보다 녹슨 칼이 필요하다.

섬을 탈출할 결심을 한 윤규복은 죽은 투르트의 등껍질로 고속버스만한 다이아몬드를 간다. 세계 최고의 자존심인 투르트의 등껍질은 윤규복이 섬을 탈출할 도끼가 된다.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늘 시간은 언제나 곁에 있다. 그 시간을 팽개쳐두는 것도, 꽉 쥐고 있는 것도 결국 내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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