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 시집 <處容斷章 (처용단장)> - 미학사 - 1991년 10월 15일
연작 '처용단장'만을 엮은 시집이다. 전집이 아니라면 처용단장을 따로 만날 수 있는 책은 이 시집이 유일하다고 개인적으로 알고 있다. 이미 연작은 완결된 지 한참이고, 시인이 돌아가신 시간도 저 멀리 있으니 처용단장 연작만을 모은 시집이 다시 발간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처용단장을 시로 처음 접한 것은 대학 시절로, 김춘수의 시집이 아닌 김현의 비평에서였다. 거기서 받은 충격은 무척 오래 나를 흔들었다. 오랫동안 김춘수의 시에 매달렸고, 그의 시를 한때 열 편 이상 외우기도 했다. 그러다 우연처럼 책방에서 이 책을 발견했고 곱게 책꽂이에 놓았다.
1부, 2부는 속에 담긴 시인의 의도를 이해하기 힘들어도 내 눈과 귀를 쉽게 잡아끌었다. 3부부터는 도무지, 그리고 아직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평론가들의 시끌벅적을 참고하면 뭔가 잡을지도 모르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다.
시만큼 소중한 것은 책의 끄트머리에 실린 몇 편의 산문이다. 거기서 시에 대한 시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책의 뒷면 만들만들한 면에 판화처럼 새겨진 '4부 2'의 3행이 눈부시게 내 몸을 두드린다. 전혀 사회참여적인 내용을 찾을 것도 없는데, 세상이 새로운 것을 끄집어내게 만든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을 시로, 어렵다며 자꾸 망설이던 의식을 깨우며 고통을 새기고 있다. 그래도 깨어있는 사람이 된 채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행복이겠지. 이런 생각을 가질 수 있어서 행복하다며 위로하는 세상이다.
위에다 내 감정을 뱉은 날도 벌써 8년을 넘겼다. 2013년 5월 28일 밤 10시쯤. 여전히 초라한 몰골과 함께 세상은 행복할 수 있다며 억지로 자조하고 있는 중이다. (결국 게으른 내 탓이 변명을 모두 차지한다.) 그리고 지금 코로나에 휘둘리고 있다. 시인은 이걸 눈이라고 할까, 비라고 할까, 천사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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